광주정씨인터넷족보

[10월호] 남구 왜 孝鄕인가 - 청룡의 화주대가 많았던 압촌 <남구웹진 2003.10>

정종환 · 2004.02.12 · 조회 23

조상이 욕되지 않게 연산의 만행에 낙향한 하곡선생 여기서 잠시 남구와 인연이 깊은 光州鄭氏에 대하여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광주정씨는 고려 충선왕과 충숙왕(1300ㅡ1350) 대에 생존하였던 臣扈(신호)라는 분으로부터 새로 관적을 받아 본이 된 광주성씨다. 문헌의 근거로 보자면 신호라는 분은 광주에서 태어나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판판도사사, 상호군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나라에 지대한 공이 있어서 광주정씨의 시조로 봉하고 사후에 고향인 광주에 묻히고 삼중대광 문하찬성사로 추증되었다. 광주정씨 족보에 그의 묘는 `光州 東距十里許 鷹鳴洞 巽坐(광주 동거십리허 응명동 손좌), 광주 그의 집 동쪽 십리 이르는 응명동 손좌 향\'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 양림동 조계 정만종선생의 아들 양촌 정엄의 효자 정려가 있는 이장우씨 가옥 일원이 광주정씨의 산실임을 간접시사해 주는 의미를 다시 새기자면 흔히 벼슬살이를 하다 고향에 돌아와 묻히고, 정려나 정문은 그 문중의 동구에 세워 세인들의 우러름을 받게 하여 그 유명한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귀향을 뜻하고, 귀천을 의미하는 고향이다. 광주정씨는 시조의 允孚(윤부)允亨(윤형) 의 두 아들아래 윤부의 아들 麟晋(인진, 完伯公派)의 현손 應鍾(응종)龜晋(구진, 東伯公派)의 현손 萬鍾에 이르고, 允亨(윤형)의 아들 九塘(구당, 判書公派)의 현손 繼宗(계종)의 3대파로 형성되면서 소파로 분파된다. 그러니까 광주정씨는 고려조에서 관적을 받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광주가 본인 성씨 가운데 33인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 내어 명문으로 알려진 광주인이다. 광주정씨의 산실이라 할 양림동 조계선생의 후손들은 거의 다 예전의 세거지를 떠났지만 완백공파 응종의 아들 犀(1488ㅡ1566)는 압촌에서 살게되면서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을 지키고 있어, 사실상 광주정씨의 산실은 역사에 남았을 뿐 압촌에 살고 있는 손들이 500여 성상의 터에 후손들이 살면서 압촌 동구에 광주정씨 세거지 표석을 세워 뜻을 기리고 있다. 시조로부터 8세 손 鄭犀(정서)의 자는 斐然(비연), 호는 霞谷(하곡)이다. 하곡선생이 압촌에 살게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그는 이곳에 사는 參議 長興高氏 自儉(참의 장흥고씨 자검)의 따님, 그러니까 霽峯 高敬命(제봉 고경명)선생 조고모님과 혼인하였으니 하곡선생은 제봉선생의 조고모부님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하곡선생이 압촌에서 살게 되었다. 압촌은 지세도 좋지만 화주대(과거 급제자가 나오면 청룡을 새겨 동구 높이 세워 지나는 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세우는 대, 일명 솟대)가 있는 곳에 또 자신의 화주대를 드날려 그 동리 앞을 지나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였던 의미로 볼 때 오늘날과는 너무도 상반된 뜻이 있다. 그러니까 조상들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공부를 하여 벼슬에 오르고, 벼슬에 오르면 바로 그 자체가 누구누구의 아들, 손자, 어느 집안의 후라고 하여 이름을 날리기 때문에 자신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성명에 명성이 드날리지만, 자칫 자신이 잘못하면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욕은 누구누구 새끼라 하여 그 윗대, 즉 조상과 가문에까지 욕되게 하였으니 그 어찌 가문과 핏줄을 중시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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