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호] 남구 왜 孝鄕인가 - 조상의 염원을 기린 존념비 <남구웹진 2003.11>
정종환 · 2004.02.12 · 조회 26
- 조상의 염원을 기린 존념비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되기 위한 표석
[전호에 이어] 하곡 정서선생은 一두鄭汝昌(일두(좀) 정여창)선생에게 글과 품신을 배운 뒤 1513(조선 중종 계유)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516년 문과 급제로 출사하여 벼슬은 병조정랑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겸 춘추관기주관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시 하곡선생의 스승과 당시 조정의 상황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정여창은 자신의 호를 일두, 한 마리 좀이라 했다. 자신을 한 마리 좀이라 하고 좀이 되지 않기 위해 소신을 꺽지 않은 분이다. 그는 점필재선생에게 글을 배운 뒤 3년 간 지리산에서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다 진사시에 입격하여 성균관 유생, 149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史草하는 직)로 출사, 시강원 설서[동궁 연산군에게 經史와 道義를 가르친 선생]를 하던 중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왕이 되자 자신의 생모를 폐비시키고 죽인 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여 안음현감으로 내친 뒤 다시 종성에 유배시켜 결국 죽었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다시 스승을 부관참시했다.
훗날 자신을 성군에 이르도록 가르친 스승에게 앙갚음을 한 연산군은 폭군으로 낙인이 찍히고, 정여창선생은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18현으로 배향되었다.
하곡선생은 이러한 연산군의 만행을 사헌부 지평으로 더 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벼슬을 버리고 압촌으로 낙향했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대대로 내려온 명문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과 스승에 대한 신의의 결단이자 이미 낙향한 아버지 이조참판 退隱齋 鄭應鍾의 뜻이기도 했다.
압촌에 은거한 하곡선생은 낮이면 밭에 나가 잡초를 뽑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고, 自娛樂(자오락, 무위자연)을 하면서 아들들에게 좋은 시절이 오면 입신양명하여 조상에게 영원한 효를 하라고 글을 가르쳐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을 뿐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선비다. 그 후손들 또한 조상과 부모에 도리를 다하여 효와 의를 중시하는 가풍이다.
鄭五觀(정오관 1721∼1790, 字 慶應)은 夔(기)의 아들로 그는 어버이 살아 계실 때 극진하게 봉양하면서도 부지런히 글읽기를 즐겼다. 부모님 상을 당하자 예와 법도에 추호도 어그러짐이 없자 모두 입을 모았던 효자다.
鄭履福(정이복 1767∼1797)은 어버이를 지극하게 섬겼을 뿐만 아니라 상사와 제례에 정성을 다한 효자라 향천하였다,
鄭宗鎭은 복촌(압촌 아랫동네) 憲均의 아들이다. 원래 천성이 온후하면서 효성이 극진했다. 어려서 어버이 상을 당하자 어른들 못지 않게 절차와 예에 어긋남이 없이 장례를 치루어 보는 이들을 더 슬프게 하였다. 그 뒤 장성하여서도 부모님 묘소와 성묘, 제례에 정성이 지극하여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한 효자다.
鄭元林(정원림 1889∼1971, 字 泰奎, 號 鳳軒)은 海豊(해풍)의 아들로 천성이 어진 그는 부모님 섬김에 몸과 마음을 다하면서도 이웃을 아꼈다. 특히 그는 동생과 조카의 교육에 남달라 그들의 앞길을 열어 주어 대소가내가 화목하여 향교의 표창을 받았다.
후손들 또한 예와 의와 효에 소홀함이 없이 500여년을 이어오면서 조상의 유지를 잠시도 잊지 않으려 동구에 세거비와 제실 앞에 존념비를 세우고, 어머니 은혜비를 세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