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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 남구 왜 孝鄕인가 - 조선시대 畵仙 겸재 정선선생 <남구웹진 2003.12>

정종환 · 2004.02.12 · 조회 19

- 조상의 사상으로 구사한  謙齋 鄭敾의 화맥은  광주비엔날레의 바탕이 되고 조선시대 謙齋 鄭敾(겸재 정선, 자 元伯, 호 謙齋)는 광주정씨 완백공파 후 應圭(응규, 1508-1568)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5대조, 고조 演(연, 1541-1621) 동지중추부사로 이어지는 명문의 손이다. 아버지 時翊(시익, 1638-1689)은 밀양박씨 自振(자진)의 여식과 혼인하여 숙종 2(1676)년 1월 3일 한성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정선은 태어나 1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여 그는 어머님을 위한 마음과 선조와 조상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스승과 군신지 의를 다하여 화원으로 출사하여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부는 호조참판, 조부는 좌승지, 증조는 사복시정으로 증직되어 영원한 효자다. 비록 1759(영조 35)년 84세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국보로 지정되어 영원히 보존되며 화성(畵聖)으로 추앙되어야 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영원한 광주인이다. 겸재선생이 태어난 곳은 한성이다. 그러나 조상의 연원은 광주다. 옛 선비들은 벼슬에 오르면 한성[서울]으로 올라갔다가 물러나면 다시 낙향하여 선영 아래 묻힌 의식세계로 보아 선생의 고향은 광주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아 잠시 고향과 성씨와 본을 짚고 넘어가겠다. 우리에게 고향이라는 말 같이 회자되는 말도 드물다.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살았던 곳, 조상의 선영이 있는 곳을 말하니 자신과 조상의 요람이다. 그래서 고향하면 그리움과 정겨움이 울컥 솟구친 줄 모른다. 성씨와 관적[본]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의 조상들이 살았던 대표적인 고을 읍호로 그 공덕을 세세손손 칭송하라는 뜻으로 왕이 하사한 연원이다. 광주의 古號(고호, 光州 또는 光山)로 성과 본이 되는 13성, 그 의미로 보면 단순한 가문만이 아닌 광주를 빛낸 표징이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 호주제를 없애자 더니 성씨를 바꾸려 든다. 하물며 2천 여 년 동안 존엄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상들의 巨錄(거록)을 한낱 발상으로 대체하려드는 것은 인간과 사물을 차별화 시킨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다. 성은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갈래이자 조상과 자신의 수직적 체계다. 이름[名]은 단지 사물에 붙여진 명사다. 그러니 성이 없으면 노예나 사물이 되고 마는 무서운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성씨와 본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이 아닌, 민족과 대 한국의 역사성이 내재되어 있는 헌법이전의 바탕이요 철칙이다. 본론으로 겸재선생은 조선조 당쟁이 극에 달했던 영조 때 서인 몽와 김창집의 6형제 중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에게 화법과 시작을 배운 뒤 김창집의 천거로 화원이 되어 주자성리학의 우주생성원리는 이와 기가 서로 작용하면서도 반전적으로 이는 불변하고 기는 편승하기에 이통기국설이라고 주장한 율곡 이이선생의 이기일원론을 바탕 삼아 호남지방의 부드러움과 풍요로움을 금강산 등지의 起山(기산)의 힘참에 음양의 조화를 이뤄 진경산수로 점묘시키는 화법을 터득했다. 그것은 단순한 자신만의 자질이 아닌 천부적인 피의 결정이자 선대의 염원이 결집되어 점묘되었으리라. 겸재선생의 진경산수 화법은 남종화의 태두가 되어 오늘날 광주비엔날레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돌아보면서 그 많은 그림 중에 서인의 영수 우암선생이 은거하였던 무봉산중은 말없이 추앙한 화선을 화성으로 추앙하자는 뜻이 참으로 아름다워 그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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