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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운 유허비

정종환 · 2004.02.12 · 조회 42

광산구 홈페이지 역사적 인물란에 고려명장 정세운 장군의 유허비 사진이 나옵니다.정세운 유허비가 있다는 자료는 어느곳에서도 보질 못했는데 광산구 홈페이지에만 있습니다.유허비가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어서 광산구청 문화재 담당자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고 합니다.전임 담당자가 근거 자료가 있어서 올렸을텐데 자료집도 못 찿겠답니다. 제 생각에는 정세운 유허비는 없는데 광주인물로 정세운 장군을 소개하기 위해서 유허비 사진을 올려 놓은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정세운 유허비가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광산구 홈페이지 고려명장 정세운(鄭世雲) ▼ 정세운유허비 확대사진 본관은 광주이며 이고장 광산출신으로 고려 공명왕때의 충신이자 뛰어난 장군이다. 공은 일찌기 무과(武科, 무관을 뽑던 과거시험)에 들어 세자(世子)로 있는 강릉대군(江陵大君, 뒤에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그 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적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어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지냈고 공민왕 5년(1356년)역적 기철(逆賊 奇轍)을 때려죽인 공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역적 기철은 원나라 순종황후 기씨(奇氏)의 큰 오빠로 동생 순종황후의 위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므로 공민왕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궁중에 주연(酒宴, 술잔치)를 베풀고 이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멋도 모르고 찾아드는 기철과 그 추종자 권겸(權謙)을 때려 죽이고 서울에 게엄령을 내려 그 일당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공은 이때의 공로로 일등공신의 서열에 끼게되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용(金鏞)과 왕의 총애를 다투게 되었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 홍건적(紅巾賊,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쓴 원나라 도적떼)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을 침노하자 다음해 봄 공은 서북면 도순참사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홍건적이 서경에 목책(나무울짱)을 세우고 성을 수리한 것으로 보아 다시 재침해올것이 분명하오니 대비해야 합니다”하였다. 그 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는데 공의 말대로 1361년(공민왕 10년)겨울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할 때 왕을 호송했다. 이때 공은 임금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민심을 위로 하도록 하고 자신은 여러고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치게 해줄 것을 주청하였다. 1362년 1월 공민왕은 정공으로 하여금 총병관(總兵官, 총사령관)을 삼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제수하여 홍건적을 치도록 하였다. 왕명을 받고 공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나라안에 침입한 홍건적을 압록강밖으로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 하였다. 1363년(공민왕 12년) 호종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항상 사이가 좋지 않던 김용(金鏞)이 공의 영달을 시기하여 거짓 왕명을 꾸며 그 졸개인 안우(安祐)를 시켜 살해하고 말았다. 뒤에 그 무고함이 밝혀져 그 당시의 최고 통치 기관의 으뜸 벼슬인 첨의정승(僉議政丞)이 추증 되었다. 공은 무량(武略)에 뛰어났으나 문장(文章)에도 能하여 많은 유집(遺集)을 남겼는데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병화(兵火)에 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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