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호] 내고장 인물 양촌 정엄 <남구웹진 2002.04>
정종환 · 2004.02.12 · 조회 16
출처 남구웹진
내고장 인물 양촌 정엄
도학명문의 산실, 양림동의 연원을 이룬
조선왕조 명종실록 편수관이었던 양촌 정 엄
楊村 光州鄭氏 淹(양촌 광주정씨 엄)은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 동지춘추관사로 『중종실록』의 편찬진이었던 棗溪 鄭萬鍾(조계 정만종)선생의 두째 아들로 1528(중종 28)년 양림동(민속자료 1호, 이장우가옥 터)에서 태어났다.
1552년 생원시 장원, 진사시 3등, 1558년 명경을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호당에 사가독서한 뒤 명종 13년 왕이 사간원 정언으로 특지(특명)를 내릴만큼 출중하였다. 명종실록 편수관으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왕조실록 편찬진이 될 정도로 책임을 다하는 한편 집에서는 지극한 효로써 부모를 섬겼다. 이에 그의 효성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효자정려를 내려 후손들이 집앞에 세웠던 효자다. 그런데 이 정려각에 애틋한 충견석상이 죽어서도 주인의 비를 지키고 있다하여 모두 개비라 하는 그 주인공의 사연은 지면상 다음으로 미룬다.
그는 예조?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두번 제수, 명종 19년 `몸가짐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웠다\'는 평, 그해 사헌부 지평, 명종 20년 다시 지평이 되자 홍문관 부제학 윤의중 등이 정엄을 체직을 간하자 왕은 `참판 정만종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성실하며 의논이 적실하고 말이 간명하고 온당하다\' 하였다. 명종 21년 `정엄의 아버지 정만종은 일찍 普雨(보우)를 칭찬하여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어린 정엄을 보우에게 글을 배우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엄을 도리(道梨)라 하였다. 중종 만년 동요에 `채여, 채여! 이를 고쳐 채라하였는데, 정이여 정이여! 정은 채를 고무시켰으니 아미타불 장차 부처가 많으리라 하였다. 보우는 李姓을 蔡롤 고쳤는데 鄭家의 고무시킨바가 되었다 한다\'는 사례를 들은 왕은 지평으로 제수, 병조정랑, 21년 사간원 헌납에 제수하면서 `정엄은 타고난 기질이 온아하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고 조심해 직에 이바지하며 규구(規矩)를 삼가 지켰다.\'라 말했다.
선조 1년 2월 장령체직, 7월 다시 장령, 선조 3년 정엄과 환벽당(광주 충효동 소재) 주인 김윤제 등을 서용하면서 수찬, 선조 4년 명종실록 편찬진 감관사 우의정 紅暹(홍섬)을 비롯하여 이 지방 송순 우참찬은 지관사, 정엄은 중직대부 종시부 첨정 지제교로 편수관이었다.
특히 전라도의 강직한 관리로 `옥송의 사건심리를 명백하게 판결할 관리로는 여산군수 정엄을 손꼽았다. 그는 외직 목민관으로도 훌륭하여 그해 다시 장령에 제수, 선조 6년 남원부사로 나갔을 때 전라순무어사 신응시가 조정에 돌아와 `특히 남원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 정엄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하여 유임시키고 경관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 왕에게 고할 정도로 그 소임을 다했다.
장령이란 감찰행정을 맡아보는 사헌부 감찰사로 어사시 또는 어사대라고도 한다. 사헌부는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 기강을 진작시킬 뿐만 아니라 풍습을 바로잡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감찰하는 곳이다. 양촌 정엄은 여러차례 왕의 특명으로 장령이 되어 공과 사가 분명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치우침이 없어서 그의 호 楊村이 바로 양림동명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던 광주인이자 광주의 빛이 되었던 분이다.
<김용휴 : 향토사가, 시인, 전 언론인, 한국문협, 한국민족문학회, 광주문협회원